
-관람일: 2010년 3월 9일(화)
-관람 장소: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캐스트: 조재현, 류덕환, 이양숙, 박인서, 김상규, 박서연
-관람 장소: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캐스트: 조재현, 류덕환, 이양숙, 박인서, 김상규, 박서연
<해리포터>의 아역배우 다니엘 래드클리프가 처음으로 데뷰한 연극 <에쿠우스>에서 전라 연기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난 영국에 있었는데, 그 때에 래드클리프의 전라 연기로 신문과 방송이 떠들썩했던 기억이 난다. 나 역시 가끔 래드클리프가 있는 극장 근처를 지나치면서 도대체 무슨 연극일까 궁금했었다. 그러나 6마리의 눈을 찌른 소년의 정신 상태를 관념적이고 난해하게 파헤친 그 공연을 한국어로 들어도 이해할까 말까인데, 영어로 들으면 도대체 뭘 이해하겠냐 싶어 관두었더랬다. 지금은 후회한다. 역시 뭐든 그 순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에쿠우스>의 경우는 워낙 이 분야의 고전처럼 인식되고 무대에 오르내린 게 셀 수 없으니 이젠 원작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에 더이상 의의를 두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연출자의 의도에 따라 무대는 계속 변화되고 있다. 그중에 내가 이번에 본 <에쿠우스>는 조재현이 연출해서 그 어느 때보다 유독 더 많이 주목되었고, 연극열전 세 번째 시즌의 문을 여는 첫번째 작품이었다. 원작을 좀더 쉽고 편하게 표현해 보겠다는 의도에 따라 올려진 공연인데, 그러한 점에서는 일단 성공한 듯하다. 막이 내린 후에도 골이 딩딩거리는 건 있어도 적어도 도대체 뭐라고 하는거냐고 되묻지는 않게 되니깐. 물론 그 당시의 대사나 행위 등의 심오한 의미를 놓치고도 놓친 줄 모르는 부분도 있겠으나, 이 공연을 처음 본 관객의 입장에서는 다른 <에쿠우스>보다 관람하기는 편했을 거라고 생각이 든다.
무대 위 양쪽 사이드에도 객석이 있고, 배우들은 무대 뒤로 퇴장하지 않고 그 객석 바로 앞줄에 앉는 방식은 <스프링 어웨이크닝>과 똑같다. 그래서 암전을 자주 사용하지 않고도 단지 조명의 위치만 바꾸어 긴 호흡으로 풀어나갈 수 있도록 했다.
무대 공간 사용은 정말 탁월했다. 각형무대와 계단 위 단상, 그 너머 가장 뒷 공간의 쓰임이 자유로우면서도 일정했달까. 다이사트의 공간이 주로 각형무대였다면 알런의 공간은 계단 위 단상이었고, 그 너머 뒷 공간은 말들의 것이었다. 서로의 공간을 엄연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한 곳에서 아우러질 때의 시너지는 정말 대단했다.
특히, 말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중압감은 가히 환상적이다. <매튜본의 백조의 호수>에서도 이런 류의 유희를 보며 감탄했는데, 역시나 인체는 굉장히 아름답고 표현력의 한계에는 끝이 없더라. 그런데 <에쿠우스>에서 느껴지는 말들의 중압감의 근본이 섬세한 근육의 움직임과 몸짓이라기 보단 큰 키와 다부진 몸매, 구릿빛 피부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1막에서는 다이사트가 해설자가 되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면, 2막에서는 이 무게 중심은 알런에게 옮겨간다. 이번 <에쿠우스>가 다이사트나 알런에게만 촛점을 맞추지 않았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다. 어찌보면 다이사트의 내면이 알런에게 동화된 것을 가장 확실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이다. 그리고 극의 막바지에 다다를 때 그들의 관계는 절정에 이르게 되고.
물론 '정상인' 다이사트가 점점 '비정상인' 알런에게 동화되는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판사 헤스터와 다이사트와의 관계에서 확실해진다. 헤스터와 다이사트는 처음에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다이사트가 알런에게 동화되는만큼 다이사트와 헤스터와의 관계는 멀어졌다. 헤스터는 현대와 문명 속에 규격화 되어 살고 있는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고, 알런은 우리의 내면에 숨겨진 본능이자 욕망이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는 다이사트의 몫이었다.
사실 난, 이런 다이사트의 모습을 이해하기엔 아직 버겁다. 아무리 시골 촌구석 병원에서 정신병자들을 돌보고, 부부 관계에 권태가 오고, 자신이 숭배하는 그리스 신화를 꿈만 꾸며 그저 마음 속으로 삭혀야 했을찌라도, 그래서 자신의 신앙을 거리낌없이 표현하고 분출하며, 꿈을 현실화 시키는 자유로운 알런을 질투한다 할찌라도, 어떻게 다이사트 알런에게 온전히 동화될 수 있는지 난 아직 모르겠다. 이 자체만으로도 난 <에쿠우스>에 완전 빠져들었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다이사트가 헤스터에게 했던 말은 내 가슴에 깊이 박혔다. 정열이란 파괴될 수는 있지만, 창조될 수는 없는 법이라고. 사실 이 연극이 말하고 싶은 걸 한마디로 축약한다면 바로 이 대사일 것이다.
조재현도 나이를 먹고 나서야 다이사트가 이해되었다고 하던데, 내가 나이를 좀더 먹으면 그 땐 이해할 수 있을까. 나이를 먹어도 내 머리가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획일화시키지 않길 바랄 뿐이다.
송승환, 조재현, 정태우, 류덕환 이들 중 조재현과 류덕환 캐스팅으로 관람하였는데, (개인적인 만족감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자칫하면 냉정하고 밋밋하게 끝내버릴 수 있을 다이사트를 조재현은 굉장히 역동적으로 표현해냈고, 돋보였다. 류덕환의 경우 이 배우를 처음 보았는데, 알런의 모습에서 광기를 쏙 빼버리고 소년의 모습만 남겼다. 근데 이게 바로 내가 원하는 알런의 모습이라 (난 알런이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흡족하다 흡족해.
물론 편하게 연출했다고 해도 한국어로 들어도 난생 처음 본 <에쿠우스>를 온전히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그러니 이러나 저러나 이해하지 못할 거라면 런던에 있을 때 래드클리프 공연이라도 볼 걸 그랬네. 뭐, 지나간 초라한 과거사야 그렇다 치고, 어쨌든 난 앞으로도 계속 여러 가지 <에쿠우스>버전을 볼 것이다. 이 연극은 특히 계속 볼수록 더 많이 보이고 이해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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